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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프 3세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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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필리프 3세는 1270년부터 1285년까지 프랑스를 통치한 왕이다. 그는 아버지 루이 9세와 함께 제8차 십자군에 참여했으나, 아버지의 사망으로 즉위했다. 필리프 3세는 툴루즈 백작령 등을 왕령으로 병합하여 영토를 확장했으나, 시칠리아 만종 사건으로 시작된 아라곤 십자군에서 실패하고 페르피냥에서 사망했다. 그의 치세는 숙부 샤를 당주와 왕비 마리 드 브라방의 영향력이 컸으며, 단테는 '신곡'에서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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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프 3세 (프랑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필리프 3세, Grandes Chroniques de France의 현대 미니어처 디테일
필리프 3세, Grandes Chroniques de France의 현대 미니어처 디테일
이름필리프 3세
프랑스어Philippe III (필리프 트루아)
별칭용감왕 (le Hardi)
재위 기간1270년 8월 25일 – 1285년 10월 5일
대관식1271년 8월 15일
대관식 장소프랑스
이전 국왕루이 9세
다음 국왕필리프 4세
출생일1245년 5월 1일
출생지포아시
사망일1285년 10월 5일
사망지페르피냥
매장지처음에는 나르본, 나중에는 생드니 대성당
가문
왕가카페 왕조
아버지루이 9세
어머니마르그리트 드 프로방스
종교가톨릭 교회
결혼과 자녀
배우자이사벨 다라곤 (1262년 결혼, 1271년 사망)
마리아 판 브라반트 (1274년 결혼)
자녀루이 드 프랑스
필리프 4세
샤를 드 발루아 백작
루이 데브뢰
오스트리아 공작부인 블랑슈
잉글랜드 왕비 마르그리트

2. 생애

1270년 아버지 루이 9세와 함께 제8차 십자군에 참가하여 튀니지 원정을 떠났으나, 아버지가 현지에서 병으로 사망하자 프랑스로 돌아와 왕위를 계승했다.[3]

1271년에는 후계자 없이 사망한 숙부 알퐁스 부부의 영지였던 툴루즈 백작령 등을 상속받아 왕령을 확장했다. 이 과정에서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가 일부 영토 소유권을 주장했으나 협상을 통해 해결했고, 교황청의 요구로 아비뇽 인근의 콩타 브네생 지역을 할양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영토를 왕령으로 편입하는 데 성공했다.[4]

그의 치세는 아버지 성왕 루이 시대의 영향으로 비교적 평온하게 시작되었으나, 1282년 시칠리아 만종 사건이 발생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 사건으로 숙부인 앙주의 샤를이 시칠리아를 잃게 되자, 필리프 3세는 숙부를 지원하며 아라곤 왕국과 적대 관계에 놓였다.[5]

1285년, 샤를을 지지하던 교황 마르티노 4세가 아라곤 왕 페드로 3세를 파문하고 그의 왕위를 필리프 3세의 아들 샤를에게 넘겨주겠다고 선언하자, 필리프 3세는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아라곤을 침공하는 이른바 '아라곤 십자군'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원정은 군사적 실패와 전염병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결국 후퇴하던 중 페르피냥에서 병으로 사망했다.[6] 공교롭게도 같은 해에 숙부 샤를, 경쟁자 페드로 3세, 교황 마르티노 4세도 모두 세상을 떠났다.

2. 1. 초기 생애

필리프는 1245년 5월 1일 푸아시에서 프랑스의 루이 9세와 프로방스의 마르가리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아들이었고 둘째였기에 프랑스를 통치할 것으로 예상되지 않았다. 그러나 1260년 그의 형인 루이가 사망하면서 그는 왕위 추정 상속인이 되었다.

필리프의 어머니 마르가리타는 그에게 30세가 될 때까지 자신의 보호 아래 머물 것을 약속하게 했지만, 교황 우르바노 4세는 1263년 6월 6일에 이 맹세를 풀어주었다. 그때부터 루이 9세의 총애를 받던 궁정 관료인 피에르 드 라 브로스가 필리프의 멘토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 루이 또한 그에게 조언을 해 주었는데, 특히 왕의 첫 번째 의무로서 정의의 개념을 심어주는 《교육 (Enseignements)》을 저술했다.

코르베유 조약 (1258년)은 1258년 3월 11일 루이 9세와 아라곤의 하이메 1세 사이에 체결된 조약인데, 이 조약의 조건에 따라 필리프는 1262년 클레르몽에서 루앙 대주교 외드 리고의 주례 하에 아라곤의 이사벨라와 결혼했다.

2. 2. 제8차 십자군 참전과 즉위

오를레앙 백작이었던 필리프는 1270년 아버지 루이 9세와 함께 제8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여 튀니스로 향했다. 출국 직전 루이 9세는 왕국의 섭정을 마티외 드 방돔과 클레르몽 백작 시몽 2세에게 맡기고 국새도 위임했다. 카르타고를 점령한 후, 십자군 진영에는 이질 혹은 장티푸스로 추정되는 전염병이 돌았다. 필리프와 그의 가족도 병을 피하지 못했다. 그의 동생 발루아 백작 장 트리스탕이 8월 3일에 먼저 사망했고, 8월 25일에는 아버지 루이 9세가 사망했다. 시신의 부패를 막고 운구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살을 뼈에서 분리하는 방식인 ''모스 테우토니쿠스''를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필리프(말을 탄 모습)가 아버지 루이 9세의 유해를 프랑스로 운구하는 장면. 15세기 후반 채색 필사본.


아버지의 죽음으로 필리프는 25세의 젊은 나이에, 자신도 이질을 앓고 있는 상태에서 튀니스에서 왕으로 선포되었다. 그의 삼촌인 나폴리의 샤를 1세가 튀니스하프스 왕조 칼리프 무함마드 1세 알-무스탄시르와 협상을 주도했다. 1270년 11월 5일, 프랑스, 시칠리아, 나바라의 왕들과 튀니스 칼리프 사이에 조약이 체결되었다.

십자군 원정의 비극 이후에도 불행은 이어졌다. 12월에는 시칠리아트라파니에서 필리프의 매형인 나바라 왕 테오발도 2세가 사망했다. 1271년 2월에는 필리프의 아내인 이자벨라가 다섯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낙마 사고로 코센차에서 사망했다. 4월에는 테오발도 2세의 미망인이자 필리프의 누이인 나바라 여왕 이자벨라마저 사망했다.

필리프 3세는 1271년 5월 21일 파리에 도착하여 아버지의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15일 랭스에서 프랑스 국왕으로 정식 즉위했다.[3]

2. 3. 통치

1270년 아버지 루이 9세와 함께 제8차 십자군에 참가하여 튀니지 원정에 나섰으나, 아버지가 원정 중 병사하면서 프랑스로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3]

필리프 3세는 아버지 루이 9세의 국내 정책 대부분을 이어받았다. 특히 1258년 아버지가 제정한 귀족 간 사적 전쟁 금지령을 유지했으며, 1274년 10월에는 이를 더욱 강화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그는 아버지의 행정관들을 대부분 유임시키며 정책의 연속성을 꾀했다.

유대인 정책에 있어서도 아버지의 방침을 따랐으며, 이는 경건함을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었다. 1271년 9월 23일 파리로 돌아온 필리프는 유대인에게 특정 표식을 의무적으로 착용하게 한 아버지의 명령을 다시 시행했다. 또한 1283년 칙령을 통해 유대교 회당과 유대인 묘지의 신규 건설 및 수리를 금지하고, 유대인이 기독교인을 고용하는 것을 막았으며, 유대인들의 종교적 소음(strepiti|스트레피티프랑스어, 너무 크게 외치는 것)을 억제하고자 했다.

1271년 8월 21일, 숙부인 푸아티에 백작 겸 툴루즈 백작 알퐁스와 그의 부인 잔이 자녀 없이 사망하자, 필리프 3세는 그들의 광대한 영지를 상속받아 프랑스 왕실령에 통합했다. 이 상속에는 오베르뉴 일부(훗날의 오베르뉴 공작령)와 아제네 등이 포함되었다.[4] 그러나 알퐁스의 유언에 따라 1274년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에게 콩타 베네생 지역을 양도해야 했다. 한편, 잉글랜드에드워드 1세가 상속 영토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으나, 1279년 아미앵 조약을 통해 아제네를 잉글랜드에 반환하는 조건으로 타협했다.[4] 필리프 3세의 통치 기간 동안 왕실 영지는 꾸준히 확장되어, 기엔 백작령(1281년), 툴루즈 백작령(1271년), 알랑송 백작령(1286년), 오베르뉴 공작령(1271년) 등이 편입되었고, 아들 필리프의 결혼을 통해 나바라 왕국에 대한 영향력도 확보했다.

1271년 9월 19일, 필리프는 툴루즈의 관리들에게 귀족과 도시 의회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이듬해 푸아 백작 로제-베르나르 3세가 이에 반발하여 툴루즈 백국을 침공하고 왕실 관리들을 살해했으며 솜뷔(Sombuy) 마을을 점령했다. 왕실 원수 유스타슈 드 보마르셰가 반격에 나섰으나 필리프의 명령으로 잠시 철수했다. 필리프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1272년 5월 25일 툴루즈에 도착했으며, 6월 1일 아라곤의 하이메 1세와 만나 중재를 시도했으나 로제-베르나르가 거부했다. 이에 필리프는 푸아 백국을 초토화시키는 강경책을 사용했고, 결국 6월 5일 로제-베르나르는 항복하여 카르카손에 투옥되어 쇠사슬에 묶였다. 필리프는 그를 1년간 투옥한 후 석방하고 영지를 돌려주었다.

필리프 3세 치세는 대체로 평온했으나, 1282년 시칠리아 만종 사건으로 숙부인 앙주의 샤를이 시칠리아를 상실하자 상황이 급변했다. 필리프는 샤를을 지원하면서 아라곤 왕국과 적대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5] 샤를을 지지하던 교황 마르티노 4세는 1285년 아라곤 왕 페드로 3세를 파문하고 아라곤 왕위를 필리프 3세의 아들 샤를에게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6] 이에 필리프 3세는 대규모 아라곤 십자군을 일으켜 아라곤을 침공했으나, 군사적 실패와 전염병으로 인해 큰 손실을 입고 후퇴해야 했다. 결국 필리프 3세는 1285년 후퇴 도중 페르피냥에서 병사했다.[6] 공교롭게도 같은 해에 숙부 앙주의 샤를, 아라곤 왕 페드로 3세, 교황 마르티노 4세도 모두 사망했다. 이 무리한 원정은 프랑스 왕실 재정을 거의 파탄 상태로 몰아넣어 후계자에게 큰 부담을 안겼다.

2. 4. 나바라와의 관계

1274년 나바라의 앙리 1세가 사망하자,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는 앙리 1세의 어린 상속녀인 후아나로부터 나바라 왕위를 차지하려 시도했다. 알폰소 10세의 아들 페르디난드 데 라 세르다는 군대를 이끌고 비아나에 도착했으며, 동시에 알폰소 10세는 자신의 손자 중 한 명과 후아나를 결혼시키기 위해 교황의 승인을 얻으려 했다. 앙리 1세의 미망인이자 후아나의 어머니인 아르투아의 블랑슈는 잉글랜드아라곤으로부터도 후아나와의 결혼 제안을 받고 있었다.

카스티야의 군사적 위협과 여러 외국 세력의 압박에 직면한 블랑슈는 자신의 사촌인 프랑스 왕 필리프 3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필리프 3세는 이를 나바라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영토를 확장할 기회로 보았고, 후아나 측은 왕국을 보호하기 위한 군사적 지원을 얻고자 했다. 1275년, 필리프 3세와 블랑슈는 오를레앙 조약을 체결하여 필리프 3세의 아들(루이 또는 필리프)과 후아나의 결혼을 약속했다. 이 조약은 또한 나바라가 프랑스 국왕이 임명하는 총독에 의해 통치될 것을 명시하여, 사실상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1276년 5월까지 프랑스 총독들은 나바라 전역을 돌며 어린 여왕 후아나에 대한 충성 서약을 받았다.

그러나 프랑스의 간섭과 통치에 불만을 품은 나바라 사람들은 곧 반발하기 시작했다. 친 프랑스 정책과 프랑스인 총독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나바라 내부에서는 카스티야나 아라곤의 지원을 받는 두 개의 반란 세력이 형성되었다. 1276년 9월, 공개적인 반란이 일어나자 필리프 3세는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2세에게 군대를 주어 팜플로나로 파견했다. 필리프 3세 자신도 1276년 11월에 또 다른 군대를 이끌고 베아른에 도착했다. 로베르 2세는 비교적 신속하게 반란을 진압하고 나바라 귀족들과 성주들로부터 다시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반란은 빠르게 진압되었지만, 카스티야아라곤이 후아나와의 결혼을 통한 나바라 병합 시도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1277년 봄이 되어서였다. 필리프 3세는 이 과정에서 나바라에 끼친 피해 때문에 교황 니콜라 3세로부터 공식적인 질책을 받기도 했다.

2. 5. 시칠리아 만종 사건과 아라곤 십자군

1282년, 시칠리아에서는 필리프 3세의 숙부인 나폴리 왕 샤를 1세의 프랑스계 지배에 반발하는 대규모 봉기, 이른바 '시칠리아 만종 사건'이 일어났다.[5] 수년간 이어진 과도한 세금 징수와 프랑스인들의 압제에 분노한 시칠리아 주민들은 섬 내의 많은 프랑스인들을 살해했다. 이 혼란을 틈타 아라곤 왕국의 페드로 3세는 시칠리아에 군대를 상륙시켜 반란 세력을 지원했고,[5] 1282년 9월 4일 스스로 시칠리아의 왕위에 올랐다.

이 사건은 프랑스 왕가와 교황청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 교황이었던 교황 마르티노 4세는 프랑스 출신으로 샤를 1세를 강력히 지지하고 있었기에, 페드로 3세를 즉시 파문하고 그의 아라곤 왕국 소유권을 몰수한다고 선언했다.[6] 나아가 교황은 아라곤 왕위를 필리프 3세의 아들인 샤를 드 발루아에게 넘겨주었다.[6] 한편, 시칠리아에서 숙부 샤를 1세를 돕던 필리프 3세의 동생 페르슈 백작 피에르는 1283년 레조 디 칼라브리아에서 사망했다. 그는 후사 없이 죽어 알랑송 백작령은 1286년 왕령으로 귀속되었다.

숙부 샤를 1세와 교황 마르티노 4세, 그리고 아내 마리 드 브라방의 부추김을 받은 필리프 3세는[5] 시칠리아 만종 사건에 대한 보복과 아들 샤를 드 발루아에게 주어진 아라곤 왕위를 확보하기 위해 아라곤 왕국과의 전쟁을 결심했다. 교황의 지지를 등에 업은 이 전쟁은 '아라곤 십자군'으로 불리게 되었으나,[6] 후대의 한 역사가는 이를 "카페 왕조가 벌인 가장 부당하고, 불필요하며, 비참한 사업"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1284년부터 1285년까지 이어진 아라곤 십자군에서 필리프 3세는 아들들과 함께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카탈루냐로 진격했다. 1285년 6월 26일, 프랑스군은 지로나를 포위했고, 격렬한 저항 끝에 9월 7일 도시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프랑스군 진영에 이질이 급속도로 퍼져나갔고, 필리프 3세 자신도 이 병에 걸리고 말았다. 전염병과 군대의 사기 저하로 인해 프랑스군은 철수를 결정했지만, 1285년 10월 1일 콜 드 파니사르 전투에서 퇴각하던 프랑스군은 아라곤군의 공격을 받아 큰 패배를 당했다. 결국 필리프 3세는 1285년 10월 5일, 국경 근처 페르피냥에서 이질로 사망했다.[6] 공교롭게도 같은 해에 그의 숙부 샤를 1세, 적수였던 페드로 3세, 그리고 그를 부추겼던 마르티노 4세 교황도 모두 사망했다.[6]

필리프 3세의 시신은 당시 독일 지역 귀족들 사이에서 행해지던 장례 방식인 'Mos Teutonicus|모스 테우토니쿠스la' 절차에 따라 처리되었다. 유해의 부패를 막고 운반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살을 발라내어 나르본 대성당에 안치했고, 내장은 노르망디의 라 노에 수도원에, 심장은 파리의 자코뱅 수도원(현재는 철거됨)에, 그리고 뼈는 역대 프랑스 왕들이 묻힌 생 드니 대성당에 각각 나누어 묻었다. 그의 아들 필리프 4세가 프랑스 왕위를 계승했다. 아라곤 정복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났고, 프랑스 왕실 재정에 큰 부담을 안겨주었다.

3. 가족 관계

필리프 3세는 두 번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다.

첫 번째 결혼은 코르베유 조약에 따라 1262년 5월 28일 클레르몽에서 이루어졌다. 상대는 아라곤의 왕 하이메 1세와 그의 두 번째 왕비 헝가리의 욜란다의 딸인 이사벨라 다라곤이었다. 결혼식은 루앙 대주교 외드 리고가 주례했다. 이사벨라는 1271년에 사망했다.

이사벨라와의 사이에서는 4남과 1명의 사산아를 두었다.

이름출생사망비고
루이1264년1276년 5월왕위 추정 상속인이었으나 요절
필리프 4세1268년1314년 11월 29일아버지의 뒤를 이어 프랑스 국왕 즉위. 나바라 여왕 후아나 1세와 결혼.
로베르1269년1271년
샤를1270년 3월 12일1325년 12월 16일발루아 백작. 발루아 왕조의 시조. 마르그리트 도 나폴리, 쿠르트네의 카트린 1세, 마오 드 샤티용과 차례로 결혼.
남자아이1271년1271년사산



이사벨라 왕비가 사망한 후, 필리프 3세는 1274년 8월 21일 뱅센에서 브라반트 공작 앙리 3세와 브르고뉴의 아델라이드의 딸인 마리 드 브라방과 재혼했다.

마리와의 사이에서는 1남 2녀를 두었다.

이름출생사망비고
루이1276년 5월1319년 5월 19일에브뢰 백작. 에브뢰 가문의 시조. 아르투아의 마르그리트와 결혼.
블랑슈1278년1305년 3월 19일오스트리아 공작이자 보헤미아폴란드의 왕인 루돌프 1세와 결혼.
마르그리트1282년경1318년 2월 14일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 1세와 결혼.


4. 평가

필리프 3세의 통치 기간 동안 왕실 영토는 확장되었다. 1271년 툴루즈 백작령과 오베르뉴 공작령, 1281년 기엔 백작령, 1286년 알랑송 백작령을 확보했고, 아들 필리프의 결혼을 통해 나바라 왕국도 얻었다. 그는 대체로 아버지 루이 9세의 정책을 이어받고 행정관들도 그대로 유지하며 안정적인 통치를 추구했다. 그러나 아라곤 정복 시도는 프랑스 왕실 재정을 거의 파탄 상태로 몰아넣었고, 이는 후임자에게 큰 부담을 안겨주었다.

이탈리아의 시인 단테는 그의 작품 신곡에서 필리프 3세를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단테는 연옥 문 밖에 있는 여러 동시대 유럽 군주들 사이에 필리프 3세의 영혼이 있다고 그렸는데,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고 "코가 작은 자"(il Nasutoita)라고 불렀다. 또한 단테는 그를 "프랑스 역병의 아버지"(il mal di Franciaita)라고도 칭했는데, 이는 그의 아들인 필리프 4세를 염두에 둔 표현으로 해석된다.

참조

[1] 브리태니커백과사전 Philip III king of France https://www.britanni[...]
[2] 서적 佐藤、p. 193
[3] 서적 佐藤、p. 190 - 191
[4] 서적 佐藤、p. 197 - 198
[5] 서적 佐藤、p. 202 - 204
[6] 서적 佐藤、p. 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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